<구글 애드센스> 강릉의 역사가 있는 오죽헌 강릉시립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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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의 역사가 있는 오죽헌 강릉시립박물관

museum & exhibition/museum tour

by 안경쓴짤랑이 2023. 11. 14.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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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의 역사가 있는 곳_오죽헌 강릉시립박물관

율곡기념관 관람을 끝내고 나서 간 곳은

강릉시립박물관이었다. 

학교 다닐 적에 답사로 와봤던 것이 생각났다. 

오랜만에 보니 반갑기도 하고 

벌써 이렇게 시간이 지났나 싶어서 묘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휴관 : 2023년 10월 27일~2023년 12월 31일까지

현재 휴관 중!  

강릉시립박물관의 전경 

힘들어서 그냥 생략할까하기도 했지만 

지금 현재 휴관 중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잘 다녀왔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 

강릉시립박물관 야외박물관

 

강릉 병산동에서 발굴한  신라시대 고분과 철기시대 집터를 

그대로 복원해놓은 것이다. 

 

'여(呂)'자형 집터

 

집터의 모양은 '呂'자형인데

동예의 집터이다. 

고대의 동해안 지역은 삼국이 한창 형성되던 

원삼국시대에 '동예'라는 고대국가가 위치해 있었다. 

 

동예는 잦은 고구려의 약탈에 시달린데다가 

광개토대왕의 정복전쟁으로 인해 

동에의 많은 지역이 고구려지역으로 편입되었고 

강원도 이남 지방은 뒤에 신라로 편입된다. 

[출처: 동예_한국민족대백과사전]

 

 

강릉의 변화를 시간순서대로 나열했다. 

구석기시대부터 현대까지 

많은 변화를 거쳤음이 보인다. 

 

구멍이 뚫린 백자

 

고려시대인 11세기에 만들어진 백자이다. 

바닥에 구멍이 뚫려있다. 

고려시대하면 청자가 유명하지만 

청자가 만들어진 시기에 같이 백자도 만들어졌다. 

하지만 조선백자에서 볼 수 있는 순백색과는 다른 색을 띄고 있다. 

귀족, 승려를 비롯한 고위층이 사용했으며

무덤에 부장품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또한 차를 마시는 문화가 발달했기 때문에

사찰에서는 차그릇으로 쓰이기도 했다. 

차그릇 외에도 다른 용도로도 쓰였지만 

청자처럼 더 발전하지 못하고

수량도 제작기술도 퇴보하고 만다. 

고려 백자의 생산지는 강릉 현내리를 제외하면 

용인 서리, 시흥 반상동, 여주 중암리 등지에서 생산되었다. 

 

이 중에서 용인 서리의 도요지는

고려 초기의 도요지이며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을 만큼 

고려백자의 기원과 발전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유적이다. 

용인 서리의 고려백자 생산지_출처:한국민족대백과사전

 

 

강릉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

 

강릉 남항진리 한송사지에서 발견된 보살좌상이다.

한송사는 문수사의 또 다른 이름이다. 

보살상은 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보통 화강암으로 만드는데 

소재부터 특이하다. 

 

고려말의 문신인 이곡이 지은 시문집

'가정집'에 수록된 '동유기'에는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이

한 쌍을 이루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으며 

국립춘천박물관 소장의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과  

한 쌍을 이루었을 것으로 보고있다.

[출처: 강릉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_개설_한국민족대백과사전]

 

보살상이 지어진 시기는 고려초기이며 

아직까지 통일신라의 영향이 남아있다.

눈에 띄는 것은 머리에 원통형 관을 쓰고 있다는 것인데 

신복사지 출토 석조보살좌상,

월정사 석조보살좌상처럼 

당시 강원지역에서 유행했던 양식으로 보인다. 

어떤 보살을 형상화했는지는 불분명하다. 

[출처: 강릉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_내용_한국민족대백과사전]

 

신복사지의 석조보살좌상(출처:국가문화유산포털)과 평창 월정사의 석조보살좌상(출처:불교신문)

 

얌전히 가부좌를 틀고 있는

한송사지 석상과 다른 자세지만 

머리 위에 원통형의 관을 쓰고 있는 것은

세 석상이 모두 같다. 

그리고 신복사지와 월정사의 불상도 

고려초기에 만들어진 불상이다. 

 

 

강릉최씨의 묘지석이다. 

묘지석은 죽은사람의 인적사항이나 

무덤의 소재를 기록하여 묻은 도판이나 판석이다. 

지석의 내용은 대개 

본관과 이름, 태어난 날과 죽은 날, 고인의 행적

가족관계, 무덤의 소재 등이 기록된다. 

묘지는 조선시대 이전부터 있었는데

고구려의 동수묘지(안악 3호분, 357년), 모두루 묘지(5세기 중엽),

매지권으로 유명한 백제 무령왕릉의

묘지석(6세기 전반)도 여기에 속한다.  

 

지석은 고려시대부터 일반화된다고 하는데 

돌로 새긴 것이 대부분이다. 

후에 조선시대에 와서는 번자로 된 것이 대부분이다. 

번자는 연석이나 사기에 글을 새긴 지석을 말한다. 

 

사진 지석의 주인공은 강릉최씨인데 

조선 전기의 문신 이수혼의 아내이다. 

최수기의 딸이며 슬하에 2남을 두었다고 한다. 

가정(嘉靖) 기미(己未)년(명종 14년, 1599년)에 남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남편 이수혼은 선조 10년(1577년)에 졸한다. 

* '가정(嘉靖)'은 명 세종(재위 1522~1566)의 연호이다. 

 

대관령국사서낭과 대관령국사여서낭 신상

 

강릉단오제의 주신으로 모셔지고 있는 신들이다. 

다른 명칭으로는 대관령국사성황, 대관령국사여성황으로 불린다. 

대관령국사성황을 모시는 사당은 대관령에 있고

대관령국사여성황을 모시는 사당은 강릉시에 있다. 

대관령국사서낭은 구전설화에 의하면

신라의 범일국사 죽은 뒤 신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생전에 불법을 전파하고 술법을 써서 적을 무찌르는 등 

신이한 행적을 남긴 고승이라는 점에서 

지역의 수호신으로 받들어진다. 

[출처: 대관령국사성황사_한국민족대백과사전]

 

민속의 신이 불법을 설파했는다는 점에서 

불교가 민간에 불법을 전파시키기 위해 

민속을 어느 정도 수용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사찰에 가도 산신각이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인 것 같다. 

 

대관령국사여서낭은 대관령국사서낭의 아내이다. 

강릉에 사는 정씨의 딸이었다. 

서낭신의 정씨의 딸을 아내로 삼을려고 했지만 

정씨의 반대로 무산된다. 

그러나 서낭신은 범을 시켜 정씨의 딸을 납치해 아내로 삼는다. 

정씨는 납치된 딸을 겨우 찾았지만 

딸은 정신은 없고 몸만 비석처럼 서있었다. 

가족들이 화공을 불러 딸의 화상을 그려 세우니

비석처럼 서 있던 처녀의 몸이 비로소 떨어졌다고 한다.

[출처: 대관령국사여성황사_한국민족대백과사전]

 

이 신화는 박물관에 그림으로 설명이 되어있으니

참고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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