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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근대를 볼 수 있는 곳인 대구근대역사관에 갔다.
대구근대역사관은 일제강점기 때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 건물을 개조해서 만든 박물관이다.
경상감영공원 종각 방향으로 나가면 대구근대역사관 입구로 갈 수 있다.
대구근대역사관은 2층으로 구성되어 있고
2층으로의 이동은 엘리베이터만을 이용해서 가능하다
구식건물이기도 하고 계단이 높아서 위험하기 때문이다.
관람정보
관람시간 : 09:00~18:00(17:30 입장마감)
월요일 휴관
공휴일 운영 시 그 다음날 휴관
대구근대역사관은 과거 일제시대 때 지어진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을 개조했다.
그래서 대구근대역사관이 은행이었을 때의 창고가 전시실로 개조되어 있고
그 당시 사용했던 화폐같은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근처에 있는 경상감영의 모습이 어떻게 변천했는지 보여주는 전시도 있다.
대구근대역사관을 실제크기의 1/65로 축소시켜 놓은 것이다.
대구읍성은 친일파 박중양에 의해 성이 해체되고 만다.
해체된 돌들은 여기저기 흩어지고만다.
일부는 이 곳 역사관에 전시되어 있고 일부는
계명대학교 성서캠퍼스 본관의 일부로 남아있다.
대구읍성은 영조 대에 지어져
고종 대에 대대적인 보수를 거쳤다.
대구읍성이 철거되기 이 전의 모습은
프랑스의 인류학자이자 탐험가인 샤를 바라라는 사람의
'조선기행'이라는 책에 묘사되어있다.
1905년 러일전쟁 이 후 일본인들의 침탈이 본격화되었고
결국 대구역과 연결되는 시가지와 도로 건설을 목적으로
대구읍성 파괴가 결정되었다.
기존의 한국인 상권을 파괴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대한제국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친일파 박중양에 의해 주도되었고 대구읍성은 결국 파괴된다.
대구읍성을 파괴한 후 주변은 일본인들이 장악하게 되었다.
일본 군대와 자본을 동원하여 주변의 토지와 가옥을 차지했다.
그 결과 일본인들은 대구 중심부를 장악하고 만다.
경상감영 선화당 앞에서 세워져 있었다는 석인상 중 하나이다.
1905년 무렵에 찍힌 사진 속에 있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자세한 용도는 현재도 연구 중에 있다.
김광제는 서상돈과 함께 1907년 대구 국채보상운동 주도자이다.
대구 국채보상운동은 일본에 빌린 차관(정확히는 일제가 떠넘긴) 국채를 갚는 운동이다.
대한매일신보, 만세보, 제국신문 등 여러 언론의 지지와 후원을 받았다.
의연금을 관리하고 국채보상운동의 추진을 위한 관리를 위해 대한매일신보 내에 기관을 설치한다.
이 때의 임원으로 한규설, 양기탁 등이 선출되었다.
하지만 일본에서 그냥 두고 볼 리 없었는데
정미칠적(1907년 정미조약 체결) 중 하나인 송병준이 지휘하던 일진회가 방해를 하고
통감부에서는 양기탁에게 횡령이라는 누명을 씌워 수포로 돌아가게 한다.
대구로 놀러왔다면 한 번쯤은 가보기를 권하고 싶다.
바로 앞에는 카페 넌테이블도 있어 전시를 다 보고 커피 한 잔 하는 것도
좋은 것 같다.
대구근대역사관 건물을 배경으로 찍는 사진이 정말 예쁘니
추억을 남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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