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 애드센스> 서울 명동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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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명동성당

history remains trip

by 안경쓴짤랑이 2023. 5. 12.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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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의 심장 명동대성당

한국 천주교의 심장인 명동성당에 다녀왔다. 

천주교가 신앙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의 성당이나 천주교 성지에 관심이 있던차에 

한 번쯤은 들러보고 싶었다. 

명동대성당 앞에는 에스프레소바 몰또 에스프레소바가 있다.

나중에 소개하겠다. 

명동거리도 성당에서 멀지않다. 

밖에서 찍은 명동성당의 모습과 성당내부

아직 미사시간은 아니지만 기도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 내부 모습만 살짝 찍어왔다.

다른 사람의 SNS를 통해 보던 사진 속 모습을 실제로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분위기가 조용하고 엄숙했다. 

 

2018년에 갔던 대구 계산성당

대구 계산성당 사진

 

무엇보다 건물이 너무 아름다웠다. 

날씨가 좋아서 성당이 더욱 예쁘게 보였다. 

사진 찍으러 온 사람들이 많긴 했지만 

번잡한 명동시내에서 유일하게 고요한 곳이었다. 

대구에 있는 계산성당도 예쁘지만 명동성당이 더 크고 더 예쁘다. 

계산성당도 가본지 오래라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의할 점은 미사시간에는 들어갈 수가 없다.

미사시간이 아닌 시간에도 신도들이 기도하고 있으니

조용히 조심스럽게 다녀오자. 


명동대성당 한국 천주교의 역사

명동대성당 한국 천주교의 역사 그 자체이며 심장인 곳이다. 

여러 명의 순교자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 곳이고 

한국에서 처음 교회 공동체가 만들어진 곳이기도 하다. 

 

한국 천주교가 처음부터 종교로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17세기 무렵부터 청을 통해 들어온 천주교는 '서학' 의 일부로 

조선에 유입되어 학문으로 연구된다. 

그러다가 권철신, 정약전, 이벽에 의해 종교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승훈 초상화 출처_카톨릭 신문

한국 천주교의 시작은 이승훈이 북경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세례를 받기 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780년 천진암에서 권철신이라는 인물이 강학회를 연 것이 그 시작으로 볼 수 있다. 

 

김범우 초상화 출처: 가톨릭자료실-굿뉴스

1780년 가을에는 명례방에 살던 역관 김범우 토마스가 천주교에 입교한다.

자신의 집을 교회 예절 거행과 교리 강좌를 여는 등 종교집회를 위한 장소로 제공한다. 

하지만 형조의 포졸들에 의해서 발각되고 만다. (을사 추조 적발사건, 1785

그 결과로 김범우는 형벌과 유배를 당하게 된다. 

그는 유배지인 밀양에서 사망한다. 이 사건으로 김범우는 한국 최초의 순교자가 된다. 

김범우의 사 후 그의 집터에는 명동성당이 세워지게 된다. 

 

명례방은 1830년(순조 30년) 이 후에는 선교사들의 비밀공간이 되었으며 

1845년(헌종 11년)에 김대건 신부가 활동하던 곳이었다. 

 

약현성당(출처:오마이뉴스)과 용산신학교(출처:국가문화유산포털)

 

1882년에 블랑 주교에 의해 명동성당터가 매입되며 종현 서당이 지어진다. 

그리고 한불수호동맹(1866)이 체결되자 나머지 부지들도 매입하여 

언덕을 깎아내는 정지작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풍수지리적 문제로 정부와 소유권 분쟁이 발생하고 만다. (1888년)

4년이 지난 후에야 기공식을 할 수 있게 된다,(1892년)

성당의 설계와 지휘는 코스트 신부가 맡았는데

코스트 신부는 약현성당용산신학교의 설립도 도맡았다.

코스트 신부는 1896년에 숨을 거두었고, 그 뒤를 이은 프와넬(위돌 박) 신부에 이르러

성당이 완성되었다. 

 

 

성당이 완공된 뒤 지하묘역에는 기해박해, 병인박해 당시의 순교자들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1839년 9월에 순교한 엥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의 시신을 한강의 모래밭에서

수습한 뒤 지금의 서강대학교가 있는 노고산에 4년간 매장했다. 

1843년 삼성산에 이장했다가 1901년 명동성당으로 모셔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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