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 애드센스> 대구 효목동 망우당공원에 있는 영남제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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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효목동 망우당공원에 있는 영남제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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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경쓴짤랑이 2023. 10. 2.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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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로 들어오는 관문이었던 영남제일관

망우당공원에 위치한 영남제일관은

원래 대구의 남쪽을 담당하던 성문이었다. 

 친일파 박중양에 의해 대구읍성이 철거되면서 함께 철거되었는데 

1980년에 지금의 위치에 복원된다. 

복원은 옛 사진을 보고 복원한 것인데

원래 규모보다 크게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졸속 복원이며 원래의 모습과 동떨어진 복원으로 혹평을 받고있기도 하다. 

이번에는 영남제일관과 함께 대구읍성에 관해 포스팅을 해보고자 한다. 

 

영남제일관은 호텔인터불고 근처에 있다.

원래는 중구 남성로 약전골목과 종로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했다고 한다. 

 

영남제일관의 외관

규모가 크고 망루로 올라가면 화랑교일대가 보인다. 

가장 적응이 안되는 것은 성문 앞에 있는 마네킹들.. 

멀리서 보면 실제로 사람이 서있는 것 같아서 아직도 흠칫 놀란다. 

 

대구부수성비와 영영축성비

영남제일관으로 올라가기 전에 두 개의 비석이 나란히 서있다. 

왼쪽은 대구부수성비, 오른쪽은 영영축성비이다. 

 

대구부수성비는 경상도관찰사이면서 대구도호부사였던 김세호가 

경상감영의 성을 대대적으로 보수한 뒤 이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고종 6년에 세워졌으며 김세호가 직접 비문을 지었다. 

대구읍성이 헐리면서 이곳 저곳 떠돌다가 1932년에 대구향교에 보관된다. 

1980년에 영남제일관을 복원하면서 함께 현재의 위치로 오게 되었다. 

 

영영축성비는 영조 대의 관찰사이면서 대구도호부사였던 민응수가 임진왜란으로 

허물어진 대구읍성을 쌓은 뒤 그 규모와 공사과정을 기록한 비석이다. 

원래 흙으로 쌓아서 만든 토성이었던 대구읍성은 

이 때에 비로소 석성으로 축성되었다. 

마찬가지로 친일파 박중양에 의해 대구읍성이 철거되면서 

대구부수성비와 마찬가지로 이곳저곳 떠돌다가 1932년에 대구향교에 보관된다. 

 그 후 1980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겨진다. 

영남제일관은 계단을 타고 올라가 망루로 갈 수 있는데 

계절마다 개방시간이 다르므로 참고하길 바란다. 

망루로 올라가면서 본 영남제일관의 지붕과 

망루에서 바라본 금호강 일대 

아파트단지와 도로 뿐이어서 좋은 풍경은 아니다. 

 


대구읍성에 대하여

영남제일관은 대구읍성의 남쪽 관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대구읍성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읍성이란? 

지방의 관아와 민가를 둘러서 쌓은 성을 말한다. 

언제부터 읍성을 쌓기 시작했는지 알 수 없지만 

통일신라 시기 신문왕 대에 읍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등장하며 

고려시대에 와서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주요 지방도시에 축성되었으며 대부분이 토축이었다. 

고려시대에 지어진 토축성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졌으며 

조선 정부에서는 지역의 중요성이나 인구의 증가에 따라

석축으로 다시 짓거나 보수하는 작업을 했다.

 

읍성은 조선시대 말기까지 지속되었지만 

1910년에 일제의 읍성철거령으로 인해 대부분의 읍성이 철거되고 만다.

 대구읍성은 앞에서도 언급되었듯 1906년에 박중양에 의해 철거되고 만다. 

대구읍성의 흔적은 동성로, 북성로 같은 지명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대구읍성의 축조

대구읍성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590년에 대구부사 윤방에 의해 축성된다.

처음부터 석성이 아니라 토성으로 지었는데

선조 이전 까지만 해도 대구가 중요한 지역으로 인지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구는 임진왜란 이 후 그 위상이 달라지게 되는데 

왜군과 명군이 주둔하였거나 통과한 일이 많았기 때문에

군사적 요충지로서 지역의 중요성을 인정받게 된 것이다. 

경주, 상주, 성주 등지에 있었던 경상감영이 1601년(선조 34)에 대구로 옮겨졌다.

경상감영이 대구로 옮겨진 뒤 대구는 군사 및 행정중심도시로 떠오르게 된다. 

 

영조 대에는 대구부사 민응수의 건의에 따라 석성으로 다시 축성된다. 

당시의 공사과정을 기록한 영영축성비의 기록에 의하면

공사기간은 1736년에 4월에 시작해서 다음 해 6월에 공사를 완료했다.

 

대구읍성은 고종 대에 다시 수리를 하게 된다. 

관찰사 김세호가 주도했으며 이 과정은 대구부수성비에 기록되어있다. 

 

 

대구읍성의 구조

대구읍성의 옛 모습_출처: 본혜럴드

대구읍성은 악질적인 친일파에 의해 안타깝게도 철거되었지만 

대구 시내에 남아있는 지명으로 인해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동성로, 북성로, 남성로, 서문시장 등이 있다. 

 

대구읍성의 구조는 앞에서 소개했던 영영축성비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영영축성비의 기록에 의하면

대구읍성의 전체 둘레는 2,700m, 높이는 5m에 달했다고 한다. 

읍성의 동서남북으로 난 진동문(鎭東門) · 달서문(達西門) · 영남제일문(嶺南第一門) · 공북문의 4대문(大門)과

그보다 조금 작은 동소문 · 서소문의  2소문(小門)까지 여섯 개의 성문이 있었고

성의 모퉁이에는 동장대, 남장대, 북장대, 망경루라는 4개의 망루가 있었다고 한다. 

일반백성들은 주로 동소문과 서소문을 이용했다고 한다. 

읍성의 남서부와 동남부를 중심으로 백성들의 주거지역이 형성되어 있었고

달서문과 진동문 밖에서는 큰 시장이 열렸다. 대표적인 것이 대구 서문시장이다.

읍성 안에서는 대구 약령시도 열렸는데, 중국의 상인들이 찾아와 장사하기도 했다.

현재도 약령시 거리로써 그 흔적이 남아있다. 

 

대구읍성의 철거와 그 이후 

 

대구읍성의 철거는 대구 내에 거주하는 일본인이 급증하게되고

1906년 8월에 대구 이사청 설치를 공포하면서 본격화된다.

 일본인 상인들은 대구읍성을 골칫거리로 여겼는데 그 이유는 대구 중심부로 

자신들의 상권을 확장시키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일본군 수비대는 일부러 읍성의 허술한 부분을 부수기 시작했으며 

성벽 때문에 근대 도시로 발전하지 못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철거를 반대하는 쪽과 철거를 주장하는 쪽의 대립이 거세지자 

박중양이 조정자로 나섰는데 박중양은 '옛 것을 고쳐 새로운 것을 만든다'는 구실로 

대구읍성 해체를 감행한다. 

 

하지만 읍성 해체는 조선 정부의 허가없이 박중양의 단독으로 진행된 작업이었으며 

박중양은 자신의 두 아들을 일본으로 망명시킬 계획까지 세우면서까지 읍성 철거에 진심이었다. 

철거 이 후 박중양은 징계에 처해져야 마땅했지만

이토 히로부미의 비호아래 징계를 면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1908년 6월에 경북관찰사가 되어 대구로 돌아오게 된다.

경북관찰사가 된 박중양은 성벽철거 작업에 더욱 박차를 가한다. 

 

읍성의 철거 이후

 

읍성 해체 직후 읍성을 이루었던 성벽들은

선교사들이 가져가서 건물을 짓는데 쓰거나

박중양 본인 개 당 1냥을 받고 팔았다고 매일신보에 보도되기도 하였다.

또한  대구객사를 매각하였으며, 공자묘를 헐어버리기도 했다.

게다가 이승만, 서재필의 후원을 받던 협성학교를 내쫓기까지 했다. 

 

 대구읍성의 철거는 대구의 조선인들이 가진 전통 상권이

일본인들에게 넘어가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일본인들이 객사를 헐어버림으로서

객사 앞 종로 부근을 중심으로 개설되던 약령시의 상권도 사라지고,

객사 주위의 민가마저 일본인 상인들이 사들여 도로를 만드는 가운데,

약령시는 본래의 터전을 빼앗긴 채 1910년에

남쪽 성벽이 철거된 자리인 남성로(지금의 약령시 자리) 옮겨갔다.

 

 

더해서 성내에 살던 대구부민들의 거주지역을 일본인들이 잠식하면서

원래 살던 주민들은 서남쪽 구릉지대로 밀려나게 된다. 

일제의 지배기구와 은행, 우체국, 일본인 상점들이 대구역을 중심으로

태평로, 동성로 등 대구 동북부를 중심으로 들어서는 등 전통적인 대구의 모습은 사라지고 말았다.

 

[출처 : 한국민족대백과사전, 위키백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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