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 애드센스> 조선의 문인 남매_허난설헌과 허균의 생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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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문인 남매_허난설헌과 허균의 생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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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경쓴짤랑이 2023. 10. 30.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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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최고 문인 허난설헌 허균의 생가터

주소: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난설헌로193번길 1-16 (초당동)

이용시간 : 허균허난설헌 생가터 09:00~18:00
(12:00~13:00 점심시간)

매주 월요일/1월1일/설날,추석 당일 휴무

무료 공영주차

 

조선의 문인 남매 허난설헌과 허균의 생가터에 갔다. 

밥먹고 산책하기 위함인 것도 있고 

우리나라 최고의 문인 남매인

허난설헌과 허균의 생가가 어떤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이 날 일정이 완전히 꼬여버려서

순두부집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허난설헌 생가터로 다시 걸어 올라오는 

엽기적인 동선이 되어버렸다.  

 

허난설헌 생가터는 조선 선조 때 문신 허엽이 살았고

그의 자식인 허난설헌과 허균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ㅁ'자형의 본채와 'ㅡ'자형의 행랑채로 나뉜다.

영동지방 사대부가의 전형적인 가옥형태를 지니고 있다. 

안채와 사랑채, 곳간채가 있으며 

남녀구분을 위해 두터운 담을 쌓았다. 

 

허균과 허난설헌의 영정

허균과 허난설헌이 영정이 모셔져 있고 

주변에 허난설헌의 시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그 중에는 수능시험에 단골로 나오는 

'규원가'

자식을 잃은 슬픔을 절절하게 나타낸

'곡자(哭子)'도 있었다. 

 

허난설헌 동상

 

허난설헌과 허균의 아버지

허엽은 첫 번째 부인인 청주 한씨와 사별한 뒤 

강릉 김씨와 재혼했는데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허봉, 허초희, 허균이다. 

본명이 '초희'이고 호가 '난설헌'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밝고 시적재능이 뛰어났는데 

불과 8세의 나이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 (廣寒殿白玉樓上梁文)〉을 지었다고 한다.

동생의 재능을 알아본 허봉에 의해 

오빠들과 같이 손곡 이달의 밑에서 학문을 배웠다. 

 

15세가 되던 해에 김성립(1562-1592)과 결혼하는데

부부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다고 한다. 

김성립에 대해서는 학문과 가정에 소홀하며

기방에만 드나드는 

한량으로 알려져있다. 

그러나 그의 친구나 친척들이 남긴 기록을 보면 

성품이 강직하고 문장에도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아내의 능력이 뛰어난 탓에 가려졌지만 

그 자신도 '문명'이라고 불릴정도로 재능이 있었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으로 활동할 정도로 의로운 사람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전사한다. 

그의 사후 조정에서는 그를 이조참판으로 추증하고 

허난설헌을 정부인으로 추증한다. 

 

고된 시집살이와 불행한 결혼생활에 이어 

어린 자식들이 병에 걸려 요절하고 만다. 

이 때 한탄하며 쓴 시가 '곡자'라는 시다. 

또한 오빠 허봉이 이이를 탄핵하다가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류성룡의 도움으로 유배형에서 풀려나지만 

여기저기 유람생활을 하다가 황달과 폐렴으로 세상을 떠난다. 

이 때가 그의 나이 38세였다. 

이렇듯 연이어 일어난 불행으로 인해 병을 얻은 

난설헌은 27세라는 젋은 나이에 요절한다. 

사후 허난설헌의 작품은

동생 허균이 누나의 작품을 모아 '난설헌집'을 만들어 간행한다. 

 이 후 명과 일본에서도 난설헌의 작품이 간행된다.   

허난설헌 생가 뒤 쪽의 산책길

허난설헌 생가 뒤 편에 있는 산책길이다. 

길도 잘 정비되어있고 

날씨가 좋아서 산책하기 좋았다. 

뭣보다 시원하게 쭉뻗은 소나무가 멋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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