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 애드센스> 대구국채보상운동기념도서관 전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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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국채보상운동기념도서관 전시실

museum & exhibition/museum tour

by 안경쓴짤랑이 2023. 10. 23. 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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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바뀐 대구국채보상운동기념도서관

구.대구시립중앙도서관이 

국채보상운동기념도서관으로 새롭게 바뀌었다.

코로나 이 후로 처음 가기 때문에

 전과는 다른 느낌이 들었다. 

주소 : 대구광역시 중구 공평로10길 25

운영시간 : 유아,어린이자료실 09:00~18:00(평일)/ 09:00~17:00(주말)

 종합자료실 09:00~20:00(평일)/ 09:00~17:00(주말)

인문자료실 09:00~22:00(평일)/ 09:00~17:00(주말)

매월 1,3주 월요일, 법정공휴일 휴관

 

국채보상공원 안에 있는 시설들이다. 

국채보상공원 근처에는 서문시장, 청라언덕 등의 근대문화명소가 있다. 

도서관 2층에 있는 국채보상운동 정신관은

국채보상운동과 관련된 신문자료, 기부물품 등을 전시해 놓았다. 

국채보상운동의 흐름을 정리한 연표와 

국채보상운동의 영향 및 의의를 소개하는 것으로 전시가 시작된다.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은 2017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됐는데 

이것을 홍보하고 그 정신을 기리기 위해서

전시실을 대대적으로 정비한 것 같았다.  

연안이씨문중에서  1907년 3월에

국채보상의연금을 보내면서

작성한 간찰이다. 

당시 연안이씨문중의 의연금 출연에 대한 기사가

대한매일신보에 실린다. 

이것 외에도 개인이 보낸 간찰도 있었다. 

 

연안이씨문중 의연금 출연 대한매일신보 기사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

아카이브 유형 생산일자 소장처 복제본 소장 여부 크기 (가로*세로*폭) 유네스코 등재여부 문서 유형 신문 유형 신문명 지면 저자 서명 총권수 권차 장차 판종 아카이브 설명 원문 제목 원문 내

www.gukchae-archive.org

 

대한매일신보 국채 1,300만 원 보상 취지서이다.

대구 광문사 사장 김광제, 서상돈 등이 국채보상을 시작하며 

서신을 보내 알리는 내용이다. 

나라 빛 1,300만 원은 곳 우리 대한의 존망에 관계된 일로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하게 된다. 

2천만 동포가 3개월 동안 담배를 끊고

그 대금을 한 명당 20전씩 거둔다면

대강 1,300만원이 될 수 있다는 내용이다.  

해당 내용은 대한매일신보 1907년 2월 21일자 신문 3면에 있다. 

전시된 부분은 4면에 해당되어 관련 내용을 찾기가 어렵다. 

국채보상운동 당시 아녀자들이 기부했던 비녀와 노리개 

빚더미에 오른 나라를 구하기 위해 

성별이나 신분을 뛰어넘어 모두가 힘썼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비록 일제의 농간으로 실패에 끝나서 아쉽기만하다. 

 


국채보상운동 일제의 경체침탈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에서 1908년 사이 국채를 갚기위해 국민들이 주도한 

국권회복운동이다. 

단순히 나라의 빚을 갚는 것 뿐만아니라 일본에 종속될 위기에 처한 

조선을 구하고자 함이었다.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고자하는 작업을 오랫동안 철두철미하게 진행시켜왔다. 

차관을 제공한 목적은 조선의 경제를 일본에 예속시키고 

장차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기위한 작업의 일환이었다. 

 

1894년 청일전쟁 이 후 두 번의 차관공세를 통해 각 각 삼십만 원, 삼백만 원의 

차관을 제공했고, 1904년 러일전쟁 이 후 더욱 노골화한다. 

1904년 8월에 1차 한일협약 이 후 재정고문이 된

메가타는 이 작업에 더욱 박차를 가하는데 

대표적인 것은 화폐정리사업이다. 

 

화폐정리사업은 조선 내에 일본화폐를 유통시키고 

조선의 경제에 대한 침탈을 쉽게 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사업대상은 1892년부터 주조되던 백동화가 그 대상이었다. 

일제는 백동화(구화.舊貨)와 신화(新貨)를 교환해주면서

액면가 그대로가 아닌

백동화의 상태에 따라 교환해주는 돈의 액수를 달리했다. 

다시 말하면 질이 떨어지는 백동화를

교환하면 액면가보다 더 낮은 액수의 돈을 교환해주었다.  

미리 정보를 들은 일본인 상인이나 친일파들은

상태가 좋은 백동화를 미리 입수해 피해가 적었지만 

대다수의 조선인들이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또한 앞에서 말했던 차관 공세 또한 더욱 심해져간다. 

조선에 대한 경제적 침탈을 더욱 노골화했는데 

1905년 1월에는 "폐정리자금채"라는 목적으로 

해관세를 담보로 한 차관 삼백만 원을 공세했으며 

1905년 6월에는 우리 정부의 부채 정리와 재정 융통에 필요한 자금을 구실로 

이백만 원을 공세했다. 

1905년 12월에는 조선의 자본을 일본에 예속시키기 위해 

백오십만 원을 들여왔으며

다음 해인 1906년 3월에는 기업자금채를 목적으로

오백만 원을 들여왔다. 

 

메가타가 고문이 된 1904년부터 1906년까지 

천백오십만 원의 차관이 공세된 것이다. 

그러나 

하지만 당시 조선의 재정은 이것을 갚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국채보상운동의 전개 

 

당시 조선의 재정은 세입액에 비해 세출액이 77여만 원

즉 적자재정이어서 

1,300만원의 국채를 갚는 것이 불가능했다. 

이에 일어나게 된 것이 국채보상운동이다. 

1907년 2월 대구 광문사에서 열린 행사에서 광문사의 회원이었던 

서상돈이 국채보상운동을 하자고 제의하였고 

참석자 전원의 찬성으로 취지서를 작성하여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된다. 

 

대동광문회(구. 대구광문사)는 단연회(금연단체)를 설립하고 

직접 모금운동에 나섰다. 

국채보상운동은 각계각층의 광범한 호응을 받았다. 

고종도 금연의 뜻을 밝혔고, 고위 관료들도 한때나마 참여하였다. 

가장 적극적인 층은 민족자본가와 지식인층이었다. 

민족자본가들은

인천, 부산, 원산, 평양 등지에서 상업회의소를 통해 참여했고 

지식인들은 각종 단체, 학회, 학교, 언론기관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여기에 유림, 전/현직 하급관리, 부녀층도 참여하였다. 

부녀층은 각종 패물을 의연소에 보내왔다. 

그 외에도 노동자, 인력거꾼, 기생, 백정 등의 하층민도 참여하여

범국민적인 성격을 띄게 된다.  

 

하지만 활발했던 국채보상운동은 1908년부터 시들해지기 시작한다. 

일제의 탄압과 역량부족이 원인이었다. 

국채보상운동은 신문사인 대한매일신보와

그 사장인 베델과 양기탁이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일제는 1907년부터 베델을 국외로 추방하는 공작을 펴 

1908년 5월에 금고형과 벌금형을 선고한다.  

같은 해에 양기탁을 기금을 불법으로 사용했다는

죄목을 들어 구속한다. 

양기탁 재판 판결문. 1908년 9월 29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양기탁에게 무죄를 언도한 문서이다. 일제는 증거도 없이 의연금 횡령 혐의를 씌워 양기탁을 구속했다. 총 5차례의 공판을 거쳐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국채보상운동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  출처: 대구국채보상운동기념도서관

그리고 일진회를 비롯한 친일파들의 방해도 

국채보상운동 실패에 한 몫을 담당했다. 

친일파 윤웅렬은 보상금 중 삼만 원을 반환하라는 반환청구서를 제출해 

국채보상운동에 대해 불신감을 갖도록 조장했다. 

양기탁은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통감부와 친일파의 방해로 운동은 실패하게 된다. 

 

반환청구서를 작성한 윤웅렬의 사진. 초기 친일반민족행위자 106명단에 올라있지만 일본으로부터 작위를 받은 지 1년 만에 죽었기 때문에 반민족행위자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는 의견도 있지만 해방 후 건준위와 남조선입법과도위원회, 반민특위에서는 일본으로부터 작위를 수여, 세습한 것도 반민족행위에 속한다고 보아 명단에 오르게 된것이다. _출처:위키백과


국채보상운동의 영향 

비록 실패로 끝난 운동이었지만

역사적 의의는 컸다. 

우리 역사상 최초의 국민운동이었으며 기부받은 의연금은 

훗날 민립대학 설립운동의 기초가 되었다. 

 

또한 1990년 대 후반에 대한민국을 흔들었던  IMF사태를 

극복하는데 있어 영향을 끼쳤다. 

금모으기 운동이었다. 

 금모으기 운동은 대구에서 먼저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되어갔다. 

또한 국채보상운동처럼 언론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어 

많은 협조를 얻을 수 있었다. 

외채를 갚기에는 부족한 액수여서 성공적인 결과는 아니었지만 

기업의 분식회계 종결 및 각종 부패척결의 계기가 되었다.  

 

[출처: 위키백과, 한국민족대백과사전, 두산백과,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홈페이지 발췌 및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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