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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이 아주 조금 남아있던 늦가을 시기의
영주 부석사를 다녀온 후기.
부석사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남북국시대에
의상대사가 지은 절이다.
이 후 부석사는 화엄종의 중심 사찰이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선달사, 흥교사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고려 현종 7년(1016년)에 원용국사 무량수전을 지었으며
우왕 2년(1376년)에는 원응국사 무량수전을 중수하고
다음해인 1377년에 조사당을 재건했다.
무량수전인 일제강점기인 1916년에 해체, 수리된다.
조선 영조 22년(1746년)에 추승당(秋僧堂)·만월당(滿月堂)·
서별실(西別室)·만세루(萬歲樓)·범종각 등이 불타지만
그 뒤에 다시 지어 오늘까지 이어진다.
부석사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당간지주
당간지주는 불교행사가 있는
깃발을 다는 깃대(당간)를
고정시키기 위해 만든 돌기둥이다.
부석사의 당간지주는
통일신라시대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겉에는 아무런 문양이 없고
위측의 모서리가 둥글게 마감되었다.
기둥사이에 원형으로 된 돌받침이 있는데 이것을 '간대'라고 부른다.
간대는 원형의 테 밖으로 몰딩과 연화문을 새겼다.
[출처: 두산백과]
무량수전으로 들어가기 전에 보았던
부석사 삼층석탑.
비슷하게 생긴 석탑 두 개가 나란히 서있다.
무량수전 동쪽에 있는
영주 부석사 삼층석탑과도 비슷하게 생겼다.
비율과 짜임새가 좋아 통일신라후기의 석탑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무량수전으로 가는통로인 범종루
일주문, 천왕문에 이은 세 번째 문이다.
북과 목어가 걸려있다.
영조 22년(1746년)에 불탔지만 다음 해에 다시 지어졌다.
무량수전과 무량수전에서 본 전경
날도 흐리고 비도 조금씩 오고 있어서 별로였다.
고려의 공민왕이 썼다고 전해지는 무량수전 현판이다.
홍건적의 침입을 피해 안동으로 피난을 갔다가
다시 돌아가는 길에 들러 쓴 것이라고 한다.
오래되어 보이는 것이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다.
무량수전은 아미타불을 모신 전각을 말한다.
무량수전을 다른 말로 '극락전'이라고도 한다.
아미타불은 모든 중생을 구제하여
서방 극락정토로 왕생하게 하는 부처다.
'무량광여래(무한한 진리의 빛)' 또는
'무량수여래(수명장수)'라고도 한다.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과 공포
흘림기둥은 궁궐과 사원같은
권위를 세우는 건물에서 주로 사용한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건축양식에서도 볼 수있는 양식인데
'엔타시스'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의 배흘림기둥은 지면에서 3분의 1이 되는
지점에서 가장 굵은 것이 보통이라고 한다.
사진은 찍지 않았지만
무량수전에서 내려가는 길에는 '부석(浮石)'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커다란 돌이 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는 의상대사를 흠모했던
선묘라는 여인이 용으로 변해
대사를 보호했으며
도적떼가 나타났을 때는 바위로 변해 도적들을 무찌르고
절을 지을 수 있게 도왔다고 한다.
의상은 절을 짓고 난 뒤 이름을 '부석사' 라고 했다.
이 사람을 모신 전각을 '선묘각'이라고 한다.
부석사는 안동 봉정사 극락전과 마찬가지로 현존하는
고려시대의 사찰 중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
부디 잘 보존되어 오래도록 이어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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