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 애드센스>
국립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후기
▼
메소포타미아
▼
중국
▼
중앙아시아
▼
동남아시아
▼
일본
▼
작년에 새롭게 생긴 그리스로마역사실
짧다면 짧은 기간 내에 다시 오게되었다.
어릴 때부터 그리스로마신화를 좋아한 나에게 있어
기대가 가득한 전시였다.
'킬릭스'라고 부르는 술잔이다.
그릇 안에는 에우로페 공주와
소로 변신한 제우스가 그려져있다.
(최대한 반사안되게 찍은 거..)
에우로페는 페니키아의 공주인데
제우스와의 사이에서 세 아들을 낳는다.
'유럽'이라는 지명이 에우로페에게서 유래되었다.
그녀의 세 아들 중 미노스는 크레타의 왕이 된다.
미노스의 재위시기 크레타는 문화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융성한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 시기의 크레타를 '크레타 문명'이라고 부르며
현재에도 그 때의 문화가 유적으로 생생하게 남아있다.
에우로페의 여러 형제 들 중 카드모스는
누이동생을 찾는 것을 실패하자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다른 곳에 정착해 도시국가를 건설하는데
그 곳이 바로 '테바이'라는 곳이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서는
에우로페의 납치를 좀 더 현실성있게 기록하고 있다.
페니키아 상인들에 의해 아르고스의
이오가 납치당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다시 아르고스인들이
페니키아의 공주 에우로페를
납치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왼쪽은 달의 여신 셀레네(루나)가 새겨진 등잔이다.
횃불을 들고 있어서 헤스티아(베스타)로 착각했지만
안내판에는 셀레네라고 적혀있다.
티탄신족 히페리온과 테이아의 딸이다.
태양의 신 헬리오스와
새벽의 여신 에오스와 남매지간이다.
미남 앤디미온에게 반했는데
제우스에게 부탁해
그를 영원히 잠든 상태로 만들어버린다.
더 기괴한 사실은
잠든 앤디미온과의 사이에서
50명의 딸을 둔다....
또한 제우스와의 사이에서도 헤르세와 판디아를 낳는다.
후에 레토와 제우스의 딸 아르테미스(디아나)에게
밀려 달의 여신으로서의 지위가 흔들리게 되고
디아나와 동일시된다.
오른쪽은 그리스로마신화의 신수 중 하나인
페가수스이다.
페가수스는 페르세우스가 벤 메두사의 피에서
태어난 상상 속의 동물이다.
벨레로폰테스가 키마이라라는
괴물을 물리칠 수 있도록 돕기도 했다.
기원전 430년에 만든 그리스 원작을
로마 시대에 복제한 작품이다.
아테나는 제우스와
지혜의 여신 메티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제우스는 메티스가 아들을 낳으면
아버지를 몰아낼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두려워
임신한 메티스를 삼켜버렸다.
그 후 제우스의 머리를 뚫고 나온 신이 아테나이다.
그리스의 도시 아테네는
아테나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다.
아테나는 지혜의 여신이면서
전쟁의 여신으로 유명하다.
그 외에도 직조, 요리, 기술 등을 관장하는 신이다.
아테나는 아프로디테, 헤라와 함께
트로이 전쟁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한다.
영웅 펠레우스(아킬레우스의 아버지)의
결혼식에서 아프로디테, 헤라와 다툼을 벌였다.
그 다툼의 내용은
'가장 아름다운 여신'이
황금사과의 주인이라는 것이었다.
이 다툼에 대한 판결을 이다 산의 목동인
파리스에게 맡겼는데 그는
아프로디테를 선택한다.
그 대가로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와
결혼하게 되고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는 부인을
되찾기 위해 헬레네에게
구혼했던 자들과 연합해
트로이를 침공해 멸망케한다.
전쟁 중 신들도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그리스파와 트로이파로 갈라져 다투게된다.
2세기에 만들어진 디오니소스의 흉상이다.
젊고 잘생긴 미남의 모습으로 만들어졌다.
다음 날 본 디오니소스의 흉상과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디오니소스는 포도주의 신이며 다산과 풍요의 신이다.
기쁨과 광란의 신이기도 하다.
디오니소스는 제우스와
테베의 공주 세멜레 사이에서 태어났다.
헤라의 질투로 인해 세멜레가
임신한 채로 죽었기 때문에
제우스가 자신의 허벅지에 넣고 숨겼다가
꺼내어 니사 산의 님프들에게 맡긴다.
니사 산에는 세멜레의 자매인 이노가 있는데
이노는 이 님프들과 함께 디오니소스를 양육한다.
디오니소스의 어머니에 대해서는
페르세포네, 레테, 이오, 데메테르 등이 언급되기도 한다.
[출처: 그리스로마신화 인물백과 요약]
디오니소스와 관련해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프리기아(지금의 튀르키예)의 미다스 왕은
디오니소스의 스승 살레노스를 도운 대가로
모든 것을 황금으로 만드는 능력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그 능력때문에 굶어죽을 위기에 처하게 되자
디오니소스에게 기도를 한다.
디오니소는 미다스 왕에게
팍툴로스 강에 몸을 담그라는 조언을 한다.
미다스는 조언대로 강에 몸을 담갔고
저주가 되버린 능력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미다스가 몸을 담근 강에는 사금이 나오게 되었다는 전설이 되었다.
미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전신상이다.
아프로디테의 동상은 거의 누드상인 경우가 많다.
다음 날 폼페이 전시에서 보았던
아프로디테의 동상도 반나체의 동상이었다.
인간의 신체를 가장 이상적이고
아름답게 표현한 동상이다.
성적 욕망과 관능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아프로디테의 탄생설화는
독특하면서 재미있다.
크로노스는 아버지 우라노스를 몰아내면서
그의 성기를 자른다.
잘린 그의 성기는 바다로 떨어져버리고
그는 많은 피를 바다에 흘리게 되는데
그 피가 바다와 섞이면서
거품이 일게 된다. 거품은 계속 이동을 하다가
키프로스 섬에 닿게되고 그 곳에서
태어난 여신이 아프로디테이다.
이렇게 독특한 아프로디테의 탄생은
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아프로디테는 사랑의 여신답게
여러 남성들과 염문을 뿌리기도 했는데
그 중에서 안키세스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아이네이아스는 로마의 전신이 되는
새로운 국가(라비니움)를 건설한다.
라비니움은 아들 아스카니오스에 의해
알바롱가로 계승되고
아스카니오스가 후사 없이 죽자
이복동생인
실비우스(아이네이아스와 라비니아의 아들)가 계승한다.
뒷날 후손인 누미토르의 딸 레아 실비아가
전쟁의 신 아레스와 사이에서
낳은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가
티베리스 강 기슭에서 나라를 세우는데
이 나라가 로마이다.
로마 시대에 만든 흉상을 르네상스 대에
보완한 것이라고 한다.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와 함께 3두 동맹을 맺고
이것을 기반으로 집정관에 취임한다.
재임 중에 수행한 갈리아전쟁은 로마 내에서
그의 입지를 견고하게 만들어줬다.
기원전 53년에 크라수스가 메소포타미아에서
쓰러지고 원로원의 지지를 받는 폼페이우스와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3두 동맹은 깨지게 된다.
기원전 49년에는 로마로 돌아오라는
원로원의 결정을 무시하고
로마로 진격해 정적 폼페이우스를 추격해 그리스의
파르살로스에서 격파한다.
폼페이우스는 다시 이집트로 도망가는데
이 과정에서 폼페이우스는 암살을 당한다.
카이사르는 이집트(프톨레마이오스 왕국)에서
왕위계승전쟁에 휘말리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그는 클레오파트라 7세를 왕위에 올리고
그 사이에서 아들 카이사리온을 얻는다.
카이사르는 로마로 돌아가서 각종 개혁을 실시한다.
권력이 그에게로 집중되자
카이사르의 독주를 두려워 한
원로원에 의해 살해를 당하게 된다.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파라오
클레오파트라 7세의 전신상이다.
기존의 여성 전신상과 비교했을 때와 다른
당당한 자세가 인상적이다.
클레오파트라 7세는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결혼해 이집트의
공동 통치자가 된다.
이 시기의 이집트는
언제 멸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엉망인 상황이었는데
프톨레마이오스 4세 때부터
지속되어온 왕권다툼,
외세의 개입 특히 로마의 개입,
피지배층에 대한 가혹한 정치 등으로
이미 나라는 제기능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고
이것을 더욱 악화시킨 사람은
그들의 아버지이며 전대 파라오인
프톨레마이오스 12세에 이르면
더욱 악화된다.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사후
클레오파트라와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공동통치를 하게되지만
전권을 차지하기 위한 내전이 일어나게 된다.
클레오파트라는 동생에게
전권을 뺏기고 시골로 도망친다.
그러나 전화위복의 기회가 오는데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카이사르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이집트로 도망 온 폼페이우스가
알렉산드리아에 당도하자마자
그를 암살한다.
이것은 카이사르가 내전에 개입할
충분한 명분이 된다.
카이사르는 이것을 구실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한다.
클레오파트라는 몰래 숨어들어가서
카이사르와 협상했고 카이사르는
내전에서 클레오파트라를 지원한다.
카이사르의 지원으로 이집트의 전권을 차지하게 되고
그와의 사이에서 아들 카이사리온을 낳는다.
기원전 44년 카이사르가 살해당한 뒤
새로운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데
그 주인공이 안토니우스다.
안토니우스와의 사이에서도 자식을 낳는데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와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 쌍둥이 남매와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를 낳았다.
그러나 기원 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에게 패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자살을 한다.
(동반 자살했다는 설이 있다.)
그들의 사후에 세 자녀는 옥타비아누스의
누이인 옥타비아에게로 보내진다.
(옥타비아는 옥타비아누스의 누나이며
안토니우스의 전처이다.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하기 위해
옥타비아와 이혼을 했고 이것은
그의 정치적인 악수가 되고 만다.)
안토니우스와의 세 자녀 중 클레오파트라 셀레네는
누미디아의 왕 유바 2세와 결혼하여
그녀의 자손들이 로마의 귀족과
오랫동안 통혼을 유지했다.
나머지 두 형제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지만
어린나이에 요절한 것으로
추측된다고 한다.
카이사르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카이사리온은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알렉산드리아에서 처형당한다.
전시 막바지는 그리스, 로마인의
장례문화에 대한 전시이다.
고대 그리스, 로마인은 죽음을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죽음, 잠, 여행 등으로 표현했다.
특히 산자가 계속 기억해 준다면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으로 믿었다.
그래서 망자를 잊지 않기 위해
큰 도로변에 무덤을 조성하고
묘비, 화병, 신전 모형등의 여러가지 표지물을 세웠다.
그리고 유골함과 석관에
망자에 대해 새겨놓아
망자를 잊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사진은
팔미라에서 발견된 로마 무덤 부조이다.
1세기에 로마 영토로 편입된 팔미라는
한 때 동서교역을 통해 번영한 도시였다.
이 부조 속의 망자는 에디벨이라는
남자의 아들과 딸이다.
팔미라는 현재 시리아에 위치한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다.
2011년에 시리아 내전이 일어나기 전 까지
각광받던 유적관광지이기도 했다.
서울 용산 한남동 리움미술관 고미술관 (0) | 2024.03.31 |
---|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