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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월연정

history remains trip

by 안경쓴짤랑이 2025. 1. 24.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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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전통정원 밀양 월연정

청도 적천사에 대해 쓴 이후로 

벌써 한 달도 더 지나 글을 쓰게 되었다. 

청도 적천사 다음으로 간 곳은 

밀양 월연정이다. 

밀양 월연정은 조선 전기의 문신 

이태(1483∼1536)가 지은 별장이다. 

원래 월영사라는 절이 있었던 곳을 별장으로 지었다. 

 

월연정을 지은 이태는 중종 시기의

기묘사화와 연관이 있는 인물이다. 

기묘사화는 1519년(중종 14) 11월 조광조·김정·김식 등 신진사류가

남곤·심정·홍경주 등의 훈구 재상에 의해 화를 입은 사건이다.

조광조를 대표로 한 신진사류는 

성리학을 근본으로 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개혁을 실시한다. 

그러나 조광조가 실시한 개혁은 너무나 급진적이어서 

그를 등용한 중종은 물론이고 

반대파인 훈구세력도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조광조가 실시한 개혁 중 위훈삭제는 

이러한 반감을 더욱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게되었다. 

 

그러다가 조광조와 그 일파가 완전히

숙청당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주초위왕(走肖爲王)'사건이다. 

훈구 세력의 일부는 임금의 후궁인 자신들의 딸에게 호소한다. 

두 후궁들은 자신의 나인을 시켜 밤에 몰래 꿀물을 묻힌 붓으로

나뭇잎에  '주초위왕( 走肖爲王 )'을 새겨넣게 한다. 

그 뒤에 임금에게 보여 중종에게 위기의식을 불어넣었고 

이것은 결국 조광조와 그 일파들에 대한 숙청이 단행되는 

'기묘사화(己卯士禍)'가 발생한다.

이 때 화를 입은 사림파의 문신들을

'기묘명현(己卯名賢)'이라고 부른다. 

여기까지가 사람들이 흔히 알고있는 이야기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중종에 의해 일어난 친위쿠데타로 해석한 견해도 있다.  

일을 도모했을 때 국왕의 비서기관인

승정원과 아무런 의논이 없었으며 

주요대신들을 

적법한 절차가 아니며 

죄상이 불분명하다는 것을 이유로 들었다. 

조광조와 대립관계에 있던 이들까지도 

중종의 행보를 비판하고 조광조의 사사를 애통하게 여겼다. 

 

( 출처 : 진상원, 2009, 〈안처겸 獄事와 정치범 伸寃 관행의 정착〉, 《역사와 경계》 73, 부산경남사학회  )

 

쌍경당의 처마

 

'강물과 달의 함께 맑기가 거울과 같다'라는 뜻이다. 

주변 경관을 조망하기 좋도록 방과 대청을 개방형으로 꾸몄다. 

그리고 사시사철 살 수 있도록 아궁이까지 두었다. 

월연대 

 

정자 기능이 두드러지도록 가운데에

방 한 칸을 두고 

사방을 대청으로 둘렀다. 

 

 

월연대에서 바라 본 밀양강의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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