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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돌아본 대구근대골목투어는 천주교 성지가 중심인 5코스를 중심으로 돌았다.
5코스는 관덕정순교기념관-보현사-무우관-남산 인쇄전시관-성 유스티노신학교기념관-성모당-샬르트성바오로수녀원
5코스 중에서 관덕정순교기념관-성 유스티노신학교기념관-성모당-샬르트성바오로수녀원을 중심으로 다녀왔다.
(진하게 처리된 부분이 다녀온 곳!)
관덕정순교기념관은 현대백화점에서 횡단보도를 건넌 뒤 비탈길을 조금만 올라가면 된다.
먼저 간 곳은 관덕정순교기념관이다.
관덕정순교기념관은 성인 이윤일 요한의 유해를 모신 곳이기도 하다.
이윤일 요한 뿐만아니라 천주교를 위해 희생한 모든 순교자를 기리는 곳이기도 하다.
관덕정은 조선 시대 때 무과시험 중 하나인 도시를 치르던 곳이었다.
대구 관덕정은 영조 25년에 지어졌다. 당시에는 관덕당으로 불렸다.
관덕정이 천주교와 관련이 있는 이유는
연병장 가장자리인 아미산 등마루, 속칭 ‘관덕정 말랭이’로 일컬어지는
현재의 적십자 병원 남쪽 언덕배기 처형장 때문이다.
이 곳은 조선시대 중죄인을 처형하던 3대 처형지 중 하나였다.
당시 천주교는 나라의 기틀을 뒤흔드는 위험한 사상으로 간주되어 교인들을 참혹하게 처형했다.
이 곳에서 많은 천주교인들이 박해 때(을해박해, 정해박해, 기해박해, 병인박해(1866))마다 처형당했으며
동학의 교주 최제우도 이 곳에서 처형당한다. (1864년 3월)
경상도 지역의 모든 천주교 신자들이
이 곳에서 처형당했다고 한다.
특히 병인박해로 인해
병인양요(1866, 병인박해 때 프랑스 신부가 처형되자 이것을 구실로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침략한 사건, 이 사건으로 인해 많은 문화재들이 약탈되고 소실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얼마전 영구대여형식으로 반환된 외규장각의궤)가 촉발된다.
22014년 8월 16일 처형당한 20위가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역시 가는 날이 장날이다 ^^
부활절이라 휴관했다.
사진은 안 찍었지만 입구는 성 이윤일 요한의 동상과 그의 왼쪽에는
척화비가 세워져있다. 그리고 오른쪽에는 순교하신 분들의 성함이 새긴 비석이 서있다.
지난 여름에 다녀온 사진들로 전시관 모습 대체
선교사, 순교자들이 생전 썼던 물건들과 관덕정 단청사진이다.
관덕정순교기념관의 단청의 무늬들은 기독교를 상징하는 여러 무늬로 꾸며져 있다.
보이는 것에만 간단한 설명을 하자면 다음과 같다.
구름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있음을 나타낸 것이고
십자가를 짊어진 예수 무늬는 우리의 죄를 대신 짋어진 모습을 상징한 것이라고 한다.
포도는 그리스도인을, 포도나무는 예수를 상징한다고 한다.
백합은 장미와 함께 성모 마리아의 순결함을 상징하는 소재라고 한다.
종교적인 성지를 떠나서 대구와 영남지방의 천주교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다는 것에서
의미있는 장소인 것 같다.
천주교대구대교구는 관덕정순교기념관에서 20분정도 걸어야 한다.
교구 안에 성모당, 성직자 묘지, 성유스티노신학교 건물이 있다.
별관 쪽으로 나가면 바로 앞에 샬르트성바오로수녀원이 보인다.
대구의 천주교는 영남지방 최초로 서학을 연구한 홍유한이 신자가 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1905년 이 후 개신교에서 적극적인 선교활동을 펼치게 되자 이에 맞서 천주교 또한 대응한다.
이들은 대구를 천주교 선교활동지로 지목했으며 1911년 4월 8일 대칙서에 조선대목구의 남쪽 지역을 분할하여 새 대목구를 신설하고 새 대목구장에 드망즈[한국명 안세화] 신부를 임명하면서 대구대목구가 설정되었다.
이 후 1962년 3월 10일 한국 교회가 교황청의 인가를 얻어 교계제도를 설정하게 됨으로써
대구대목구에서 대구대교구로 승격되었다.
[출처 : 향토문화전자대전]
성모당으로 가기 전에 볼 수 있는 한옥 건물이다.
대구 초대 교구장 안세화 주교가 성직자들을 위한 병원 두 동을 지었는데 그 중 부속건물에 속했던 건물이다.
'Annexe'라고 불렸는데 부속건물 혹은 별관이라는 뜻이다.
성당 부지를 기증하였던 정월생 아녜스 집안 소유의 가옥으로서 본래 지묘동에 있었지만
공산댐 건설로 수몰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었다. 이것을 대구대교구에서 기증받아 현재의 자리로 옮긴 것이다.
1996년까지 돌아가신 사제들의 빈소로 사용되었다가 2012년 주변을 정리, 보수하여 개방했다.
1911년 조선대목구에서 대구대목구로 분리되어 새 교구를 건립하던 중에
안세화 주교의 허원에 의해 만들어졌다.
1917년에 공사를 시작하고 1918년 8월에 공사를 마치고, 10월에 축성식을 가졌다.
성모당은 프랑스 피레네 산맥에 있는 루르드의 성모동굴과 크기는 물론 바위 모양까지 똑같다.
교구청에서 가장 높고, 전망이 좋은 곳에, 앞으로 넓은 잔디마당을 두고 북향으로 배치됐다.
기념틀의 모양은 교황 레오 13세가 바티칸 정원에 만들어 놓은 루르드의 성모 기념동굴을 본떴다.
내부는 암굴처럼 꾸며졌고 성모당을 바라보며 오른쪽 상단에 마리아상을 모셨다.
성모당 위에는 ‘EX VOTO IMMACULATAE CONCEPTIONI’가 적혀있는데 이것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께 바친 서원에서’라는 뜻이다.
[출처 : 가톨릭 정보-가톨릭 굿뉴스]
루르드의 성모동굴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베르나데트 수비루라는 14세의 소녀는 동굴에서 여인의 환영을 보게 되었다.
그 곳에서 그녀는 여인의 환영이 자신을 '원죄 없는 잉태'라고 칭하는 것을 듣게되었다.
그녀의 영적인 체험이 교황에게 인정받은 이 후 그녀는 수녀가 되었다.
베르나데트 수녀는 1879년에 세상을 떠나고, 1933년에 성녀로 시성되었다.
그녀의 시신은 100년이 지났음에도 전혀 부패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 주의할 점 : 많은 신도들이 기도를 드리는 공간인 만큼 조용하게 관람하자
대구대교구 초대 주교 안세화 드망즈 주교를 시작으로
최근까지 선종하신 사제들을 모신 곳이다.
1915년에 성직자묘지를 조성하기 위한 허가를 받아냈으며
테레사 수녀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1915년 11월에 축성되었다.
신학교로 통하는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바로 보이는 김대건 신부의 동상이다.
김대건 신부는 우리나라 최초 신부로 유명하다.
선교활동을 펼치던 중 천주교 신부인 것이 드러나 사형을 선고받고
군문효수형(죄인의 목을 베어 군문(軍門)에 달아놓는 벌)에 처해졌다.
조선 정부에 의해 장례도 치르지 못할 뻔 했지만
신도들이 몰래 시신을 빼돌려 미리내에 안장했다.
[출처: 한국민족대백과사전, 인물한국사]
김대건 신부는 능력이 매우 출중했는데 이 때문에 조정의 몇 몇 대신들이
구명하고자 했지만 영의정 권돈인의 주장에 따라 참수형을 선고받게 되었다.
[출처: 위키백과]
사후 1925년에 교황 비오11세에 의해 복자(福者)로 선포되었고,
1949년에는 주보성인으로 선언하고 7월 5일을 축일로 정했다.
성 유스티노신학교 전경
1914년에 개교한 최초의 신학교이며 대구카톨릭대학교의 전신이다.
부지 기증은 국채보상운동(1907)으로 유명한 서상돈이 기증했다.
만만치 않은 비용으로 인해 세계 각지에 재정 지원을 호소했고,
그 결과 1912년 11월에는 성 유스티노를 주보로 모신다는 조건으로
익명의 기부자로부터 25,000프랑을 기증받기도 하였다.
성 유스티노 신학교의 학생들이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에 참가할 계획을 세웠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못한다.
이번 코스의 마지막 장소이다.
하지만 들어가지 못한다.
수녀님들이 수행을 하는 곳이므로 출입이 금지되기 때문이다.
문앞에서 현판만 찍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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