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 애드센스> 국립대구박물관_명기(冥器), 예를 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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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대구박물관_명기(冥器), 예를 담다

museum & exhibition/museum tour

by 안경쓴짤랑이 2023. 4. 25.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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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대구박물관 테마전시 _ 명기(冥器), 예를 담다

국립대구박물관 테마전시 '명기, 예를 담다'도 함께 보고왔다. 
특별전시보다는 작은 규모의 전시지만 옛날 조선시대 사대부의 장례방식에 
대해 알 수 있는 흥미로운 시간이었다. 

관람정보 
월요일 휴무
화~일 : 09:00~18:00 
전시기간 2022.10.05~2013.10.9

명기는 죽은 이의 평안한 내세를 기원하며 무덤에 함께 묻는 부장품의 한 종류이다. 
돌아가신 이의 안녕을 기원하며 부장품을 묻는 것 자체는 아주 먼 옛날부터 있었던 일이다. 
삼국시대에는 목항아리, 굽다리토기, 토우 등을 넣었고
고려시대에는 청자로 만들어진 각종 생활용품을 넣었다.  
조선성리학의 도입과 함께 명기의 제작과 부장이 제도화되었다. 
특히 16세기에 들어 백자의 제작기술이 발달하면서 
왕실사대부를 중심으로 유행하였다. 

 

봉화 창평리 출토 그릇과 안동 권씨 문중 기증 백자 명기

명기를 제작해서 부장하는 것은 종래에 있었던 순장을 대체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가야신라 고분에서 순장의 흔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지증왕 대에 순장금지, 법흥왕 대에 불교 공인삼국사기에 나오는데 그 이후부터 

순장이 사라진 것으로 보고 있다. 

농업을 기반으로 한 사회에서는 노동력이 중요했기 때문에

순장으로 인한 노동력 손실을 막기위함이었다.

 

우리나라에서 명기가 쓰이기 시작한 것은 조선 세종 때이다.

앞서 말했듯이 명기의 제작과 부장은 국가에 의해 제도화되었다.

조선 성종 대에 편찬한 국조오례의에서는 품계에 따라 부장할 수 있는 

명기의 종류, 개수를 다르게 지정했다. 

안동 정하동 출토 백자 명기와 도기 항아리

명기는 '편방'이라는 공간을 따로 마련해 묻었다. 

묘의 한쪽 측면에 구덩을 파고 그 구덩이에 명기를 묻었다고 한다. 

명기 뿐만 아니라 생활용품과 장신구도 묻었다고 한다. 

 

사진은 안동 정하동에서 발굴된 부부합장묘인데

양 옆이 아닌 위 아래로 연결되었다. 

이 무덤은 편방을 만들지 않고 묘광 바깥의 지면보다 높은 곳에

명기와 담뱃대를 같이 두었다.  

안동 옥동 출토 백자 명기와 곰방대

안동 옥동에서 발굴된 무덤은 17세기에 조성된 회곽묘이다. 

회곽묘는 묘광에 석회층을 만들고 그 안에 관을 안치하는 형식의 묘이다.

공기가 통하기 어려운 구조이기 때문에 시신이 썩지 않고 미라 형태로 발견되기도 한다. 

그 예로  원이엄마의 편지로 유명한 이응태 묘, 현풍 곽씨 미라 등 다수의 사례가 있다. 

 

그 외에도 사진은 찍지 않았지만 죽은 이의 행적을 기리는 묘지

사대부의 장례 절차 등이 소개되어 있다. 

 

조선시대 사대부의 상장례의 모습을 집중적으로 볼 수 있어 뜻깊었고

하루하루 살아있음에 감사함을 가질 수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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